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미국 상원의 양당 의원들이 에너지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인공지능(AI) 산업의 전력 확보와 환경 보호를 둘러싼 논쟁이 커지고 있다. 데이터센터 건설로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발전·송전 시설의 건설 속도와 전기요금, 환경 심사 범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화석연료 업계와 재생에너지 업계는 인허가 간소화에 대체로 힘을 싣고 있지만, 환경단체와 일부 청정에너지 지지자들은 법안이 환경 규제와 소송 권한을 약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양당 의원 4명이 추진하는 인허가 개편안
법안의 이름은 ‘초당적 미국 부담완화·일자리법(Bipartisan American Affordability and Jobs Act·BAAJA)’이다. 공화당 마이크 리(유타)·셸리 무어 캐피토(웨스트버지니아) 의원과 민주당 셸던 화이트하우스(로드아일랜드)·마틴 하인리히(뉴멕시코) 의원이 공동으로 마련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포 코너스(Four Corners)’ 연합이라고 부른다.
법안은 태양광 발전단지와 송전선,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등 에너지 기반시설을 대상으로 한다. 인허가 심사 기간을 줄이고, 행정부가 이미 발급된 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는 한편, 일부 환경 심사 범위를 좁히고 관련 소송을 연방 법원 중심으로 제한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의 전력 수요는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데이터센터가 주요 원인 중 하나지만, 노후 전력망과 부족한 에너지 기반시설, 수급 변화도 전력·공공요금 상승에 영향을 주고 있다. 지지자들은 발전량과 송전 용량을 늘리는 사업을 앞당기면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압력을 완화하고 AI 산업의 전력 수요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본다.
송전망 확충, 풍력·태양광 전력 공급의 관건
법안의 직접적인 수혜가 예상되는 분야 중 하나는 대규모 송전망 건설이다. 송전선은 여러 토지 소유자의 부지를 통과하는 경우가 많아 노선 선정과 인허가, 소송에 수년이 걸릴 수 있다.
송전 용량이 늘면 풍력·태양광 자원이 풍부한 외곽 지역에서 인구 밀집 지역으로 전력을 보내기가 쉬워진다. 예를 들어 캔자스주처럼 풍력 발전 여건이 좋은 농촌 지역이 신규 송전망으로 다른 주와 연결되면, 더 넓은 시장에 풍력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텍사스주 사례도 송전망의 역할을 보여준다. 주 의회는 서부의 풍력 자원이 풍부한 지역과 휴스턴·댈러스 등 주요 도시를 잇는 송전선 건설을 추진해왔다. 텍사스는 현재 미국에서 대규모 풍력과 태양광 발전 모두 선두권이며, 최근에는 태양광 발전 규모에서 캘리포니아주를 앞섰다.
태양광산업협회에서 규제 업무를 총괄하는 벤 노리스(Ben Norris) 수석부회장은 법안이 여러 인허가 간소화 방안을 초당적 합의에 담아 청정에너지와 송전 용량 확대의 길을 열 수 있다고 평가했다. 분야별로 절충한 결과 더 많은 전력 공급원이 가동될 가능성이 커졌으며, 전기요금에도 하락 압력이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환경단체, 수자원·멸종위기종 보호 약화 우려
환경단체들의 반응은 엇갈리지만, 상당수는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어스저스티스 액션(Earthjustice Action)의 애비게일 딜런(Abigail Dillen) 회장은 송전망과 전력망 현대화에 관한 진전은 인정하면서도, 수역과 습지, 멸종위기종 보호 및 환경 정보 공개가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딜런 회장은 법안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과 가스발전소, 대형 데이터센터 사업의 추진을 쉽게 만들고, 환경단체가 법원에서 이의를 제기할 여지를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 속도가 빨라지면 오염과 공중보건 문제가 뒤따를 수 있지만, 법안의 심사 절차가 이런 영향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쟁점은 국가환경정책법(NEPA), 멸종위기종법, 청정수법을 비롯한 환경 규제와 관련돼 있다. 시에라클럽은 법안이 연방 환경 보호 요건을 약화하고, 주 정부가 주 법원을 통해 지역 수역을 보호할 권한도 제한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 내 일부 의원들이 법안을 지지하는 데에는 정치적 배경도 있다. 이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해상풍력 사업 허가를 취소하고 육상풍력·태양광 사업의 인허가를 늦추려 했으며, 행정부와 의회가 대부분의 재생에너지 사업에 적용되던 연방 세액공제를 폐지했다고 보고 있다. 일부 청정에너지 지지자들은 인허가 개편이 관련 사업을 보호할 수 있다고 보면서도, 법안이 석유·가스 사업에 지나치게 유리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함께 제기한다.
석유·가스 업계는 소송 제한으로 사업 예측성 기대
화석연료 업계는 주 정부와 환경단체가 때로는 연방법에 명시된 범위를 넘어서는 이유로 법원 절차를 활용해 에너지 사업을 막는다고 주장한다. 소송 범위를 제한하면 기업이 사업 추진 일정을 더 예측하기 쉬워진다는 입장이다.
미국 천연가스 생산업체 EQT의 토비 라이스(Toby Rice) 최고경영자(CEO)는 법안이 공공요금과 인플레이션 부담을 낮추고 에너지 기반시설 투자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펜실베이니아주에 본사를 둔 EQT는 길이 303마일(약 488km)의 마운틴밸리 파이프라인(Mountain Valley Pipeline)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0년간 여러 차례 지연과 소송을 겪었으며, 의회 입법을 거친 뒤에야 완공했다.
라이스 CEO는 기존 파이프라인을 확장하거나 기존 노선을 활용하는 사업은 신규 건설보다 쉽게 진행될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수년이 걸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전선 건설은 파이프라인보다 더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인허가 개편이 기업의 사업 추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천연가스와 풍력, 태양광, 차세대 지열, 원자력 등 다양한 에너지원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술 중립적 정책을 주장했다. 새로운 지열·원자력 사업이 천연가스와 경쟁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으며, 천연가스는 액화해 에너지 수요가 큰 해외 시장에 수출할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중간선거 전 표결은 어려워…환경·주 권한이 쟁점
법안이 통과되면 트럼프 행정부 임기 중 더 많은 재생에너지와 송전 사업이 인허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다만 같은 규칙이 적용될 경우 바이든 행정부가 2024년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사업에 도입한 승인 중단 조치도 앞으로는 시행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라이스 CEO는 파이프라인과 풍력·태양광 발전소, 광산, 송전선이 정부 정책 변화에 따라 중단되는 일이 반복돼왔다고 말했다. 정부는 규칙을 정하되, 각 에너지원의 사업 여부는 시장 요인이 좌우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주당은 현재 법안을 지지할지, 추후 당의 입장에 더 가까운 법안을 다시 마련할지 결정해야 한다. 내년에 새 법안을 추진하더라도 상원 통과에는 60표가 필요하고, 공화당이 지나치게 진보적이라고 판단하는 법안은 트럼프 대통령의 거부권에 부딪힐 수 있다.
지지자들이 초당적 추진 동력을 확인했지만, 11월 3일 중간선거 전에는 의회 표결이 시작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법안의 최종 성사 여부는 환경 보호와 주 정부의 심사 권한, 에너지 사업의 건설 속도 사이에서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