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기관 단위 제재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재판소의 급여와 공급업체 대금, 증인 비용 등 일상적인 자금 집행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제재가 확정될 경우 대부분의 ICC 관련 거래가 제한될 수 있으며, 6~7개월의 유예기간이 설정될 전망이다. 미국이 제재 대상을 ICC 직원에서 기관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될 수 있다.
달러 결제망이 ICC 운영에 미칠 영향
미국은 2025년 2월 서명한 행정명령 14203호에서 ICC가 미국인과 이스라엘 국민을 조사하는 행위가 국가 비상사태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ICC는 앞서 2024년 11월 가자 전쟁 관련 혐의를 근거로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와 전 국방장관 요아브 갈란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스라엘은 ICC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후 헤이그 소재 ICC의 일부 판사와 검사를 제재 명단에 올렸고, 2026년 8월에는 재판소장인 아카네 도모코도 제재 대상에 포함했다. 이 조치로 일부 직원의 은행 계좌가 폐쇄되고 신용카드가 취소됐다. ICC 판사 킴벌리 프로스트는 문제의 핵심이 불확실성에 있다고 지적했다. 개별 조치는 작은 불편에 그칠 수 있지만, 영향이 누적되면 업무 수행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달러 결제는 통상 미국 내 중개은행을 거친다. 거래 당사자가 모두 미국 밖에 있더라도 해외 은행은 달러 결제망을 잃을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제재 대상과의 거래를 선제적으로 회피할 수 있다. 따라서 제재 범위가 ICC라는 기관 전체로 확대되면, 다른 통화로 지급되는 급여와 공급업체 대금, 증인 관련 비용도 은행 심사와 결제 제한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스테이블코인도 제재 회피 수단은 아니다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전통적인 은행 계좌 없이도 가치를 이전할 수 있어 대체 결제 수단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미국의 현행 규정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제재 회피에도 분명한 제약을 둔다.
미 재무부는 2026년 4월 미국 스테이블코인 국가혁신법(GENIUS Act)에 근거한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은 허가받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거래를 차단·동결·거부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을 갖추도록 하고, 미국 해외자산통제국(OFAC) 제재 명단에 오른 대상을 식별하기 위해 거래 주소를 심사하도록 요구한다. 관련 규정 전문은 미 연방관보에 공개돼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규정 시행 전부터 유사한 조치를 취해왔다. 2026년 4월 테더는 OFAC와 협력해 트론 네트워크에서 약 3억4,400만달러 규모의 USDT를 동결했다. 이는 테더의 단일 조치로는 가장 큰 규모다. 당시 파올로 아르도이노 테더 최고경영자(CEO)는 USD₮가 불법 활동의 피난처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제재 대상이나 범죄 네트워크와 신뢰할 만한 연관성이 확인되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테더는 이전에도 이란과 관련된 지갑을 동결했다. 미국은 2026년 2월 영국의 암호화폐 거래소 2곳을 직접 제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스테이블코인이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되더라도 발행사는 미국의 제재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중앙화된 기관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비트코인도 법정화폐 환전 단계가 변수
비트코인에는 발행사가 없고 네트워크 계정을 일괄적으로 동결할 수 있는 단일 통제 장치도 없다. 기술적으로는 발행사가 거래를 관리하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과 다른 구조다. 다만 비트코인을 유로나 달러로 바꾸려면 일반적으로 거래소, 수탁기관 또는 은행을 이용해야 한다.
규제를 받는 거래 플랫폼과 금융기관은 고객과 거래를 대상으로 제재 심사를 진행한다. 따라서 비트코인이 법정화폐로 환전되는 과정의 제한을 자동으로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ICC와 그 직원들이 고려해야 할 문제는 자산을 블록체인에서 이전할 수 있는지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제 거래 상대방과 수탁기관, 최종 결제를 담당하는 은행이 해당 자금의 처리를 받아들일지도 핵심 변수다.
현재로서는 제재안의 최종 문안과 적용 범위, ICC가 다른 금융 경로를 이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다. 다만 달러 중개은행 체계,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자산 동결 권한, 암호화폐를 법정화폐로 환전할 때 이뤄지는 컴플라이언스 심사가 제재 환경에서 ICC의 일상적인 지급 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